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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1.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난 글을 글 그 자체로 읽을 뿐이라고. 헛되이 아무 물고기도 건져올리지 못할 바다에 끝없이 그물을 던져대는 어부처럼.. 의미 없는 단어와 문장의 나열을 눈을 통해 받아들이지만, 그 단어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것. 바다의 흔적 한 조각조차도. 아마 어렸을 때 부터 단순히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마도 그걸 외운다는 사실로 칭찬받기 위해서) 책을 읽었던 습관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하는 생각조차도 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웬지 세상을 인식하고 대하는 태도 자체도 이러하지 않았나 싶다. 열심히 적어내려간 문장들 속에서 사실 이외의 표현들은 모두 지워버린다. 마치 베어낸 나무를 건조시키는 것처럼. 멍한 눈을 치뜬 동물의 박제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렇게 처리된 글자들은 그저 잘 색칠된 플라스틱 피규어처럼 내 머리 속에서 떠다닌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과 형태와 빛깔을 띠고 있는 그것. 그러나 냄새는 없다. 살아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생명의) 흔적은 없다. 하지만 그 생생한 눈을 치켜뜬 플라스틱 피규어에도 먼지는 쌓이고 손이 닿은 자취가 쌓여간다.
이런 생각의 꼬리를 쫓아 달려가다보면, 나란 인간은 정말 그렇게 건조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건가. 라는 질문이 머리에 떠오르긴 하지만, 글쎄,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난 내 자신을(그리고 나의 생각을) 올바로 인식할만한 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방대한 정보량 앞에서 받아들이기에만 급급해 내 어깨 위에 있는 무엇인가로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 아직도 그런 방법을 찾고 익혀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고.
박제된 동물의, 색이 바랜 눈을 통해서 나는 세상을 본다. 죽어버린 눈을 통해 세상을 머리 속에 재구성해간다. 그리고 의미없는 글자들의 형태가, 그리고 의미없는 음성으로 채워진 뇌의 주름에서는 텍스트로 된 꿈을 만든다. 천천히 저절로 넘어가는 이야기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 같은 무채색의 꿈을.

오전 9:15 2004-01-12

...

take #2.

'그는 이불을 한껏 끌어올려 몸에 덮으며 편안함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라는 문장을 인식함에 있어서, '편안함'이란 단어에서, 나는 그 상황에서의 어떤 느낌이나 기분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편안함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라는 관용어로 인식한다고나 할까.. 내가 만약 저러한 표현을 쓰고 있다면 그건 '편안함'을 표현하고자 끼워넣은 표현이 아니라, 그저 '잠에 빠져들었다'라는 표현 앞에는 관용적으로 저러한 표현이 붙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덧붙이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때그때 삶의 순간에서의 느낌(감각에 가까운)이 없지는 않다. 일단 기계는 아니고, 어찌됐든 단백질과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니까, 느낀다. 그렇지만 감각을 기억으로 옮겼다가 다시금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은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개인적으로 Kenial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는 이야기겠지만,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이건 단지 몇 번 만나지 않은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을 만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는 것이 쉽지 않다. 오히려 같이 나눈 대화(음성이나 인터넷 메신저등을 포함한)같은 것에선 놀라운(부분적으로는) 기억력을 보여주다가도, 정작 '그때에 그 사람이 뭘 입고 있었지?'같은 것은 전.혀. 기억해낼 수가 없다.
덧붙이자면 -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예전 고등학교 친구와 뭔가 얘기를 하다가 또 다른 고등학교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얘기 중에 무심코 '그 녀석 얼굴에 점이 있었어'라는 이야기를 했더랬다. '얼굴? 얼굴 어디에?'라는 질문이 돌아오자 잠시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었더랬다 - 그 친구의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얼굴은 전혀 기억이 안나는데 얼굴에 점이 있다는 건 기억하는거지?'라는 물음이 떠오르고, 결론은 '그 녀석의 얼굴에는 점이 있었다'라는 형태의 문장만이 내 머리 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미지의 링크를 잃어버리고 x표시의 상자와 함께 텍스트만 남아있는 html 문서처럼 말이다.
나에겐 많은 기억들이 그렇다.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그리고 그때 느꼈던 이미지의 단어를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이미지마저도 단어일 뿐이다. 그저 문자로서 기억된.

오후 5:59 200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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